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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의 세이브더칠드런② 캄보디아 크라체, 김윤정 단원(6) 벌써 일년
사람들
2009.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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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체 사업장으로 향하는 저의 발걸음은 매번 기대 반 두려움 반입니다. 프놈펜 사무실에 근무하고 있는 동안 사업장에서 일어났을 많은 변화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진척 상황을 보고 실망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동시에 다가옵니다.. 쌀은행 (라이스뱅크) 사업은 특히나 그 과정이 원래의 예상보다 더디고 힘들게 진행되었습니다.

캄보디아 농민들 대부분이 소작농입니다. 소작농들은 홍수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에 특히 큰 피해를 입어 왔습니다. 풍년이 들었을 때는 가족 모두가 크게 굶지 않고 다음해를 기약할 수 있지만, 병충해나 가뭄, 홍수라도 한번 돌면 저축해 놓은 돈이나 양식이 없어 굶기 일수이지요. 또한 급히 가족 중 아픈 사람이 생기거나, 장례식이나 결혼식 등 큰 행사를 치를 때도 급전은 필요한 법. 이 때, 마을 사람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고리대금 업자에게 쌀이나 돈을 빌리게 마련인데, 100%에서 심지어 200%에 이르는 이자는 종종 마을 사람들을 더 큰 빚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게 되고 그들의 자녀들에게까지 그 짐을 지우는 원인이 되어왔습니다..

이런 상황을 근절하기 위해 우리는 마을 주민들에 의한, 주민들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기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쌀은행인데, 가난한 가족이 먹을 것이 없을 때 일시적으로 쌀을 빌려주고, 파종기에 종자씨를 준비할 수 있게 하는 종자값을 빌려주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물론 이자는 연 2할로 매우 낮은 편이고, 이를 통해 증가한 쌀은행의 쌀은 우물 건설, 길 닦기, 학교 시설 정비, 마을회관 정비, 마을에서 특히 생활이 어려운 가족 돕기 등 마을 주민들의 공공의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지난 해 8월부터 마을 주민들과의 만남을 통해 쌀은행의 중요성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지만, 본인들의 힘든 상황을 좀처럼 개선시키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보이지 않아 저는 정말 답답했어요. 주인의식을 높이기 위해서 가입비로 쌀 55kg을 내고, 쌀은행의 건설에 들어가는 인력을 포함한 나무와 각종 재료들을 마을에서 조달하게끔 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었죠. 물론 우리는 8000여 kg에 이르는 종자쌀을 지원하고, 쌀은행 건설에 쓰이는 재료 중, 마을 사람들이 조달할 수 없는 전기톱과 전문가를 지원하기로 약속했지만, 다른 지원단체들로부터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적이 있는 마을 사람들은 그다지 기뻐하는 눈치가 아니었답니다.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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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개월간의 토론과 설득 끝에 드디어 공사를 시작했어요!>

우리는 그 와중에 쌀은행이 마을 주민들의 것이고, 그들을 위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대화와 토론의 장을 열었습니다. 이를 위해 쌀은행 전담반이 마을 주민들 중 선출될 것이며, 가입비인 55kg의 쌀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도 틈만 나면 해야했지요. 무엇보다 자연재해나 급전이 필요할 때가 닥치면 그제서야 눈물을 흘리며, 할 수 없이 가지고 있는 작은 땅마저 팔아버리는 대처방법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야할 필요가 있었어요. 또한 자신에게 일어나는 불행한 일을 하나의 업으로 여기고 묵묵히 받아들이는 자세와, 크메르 루즈라는 학살의 정권을 지나오면서 주위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주민들끼리 단체로 함께 하는 활동을 꺼려한다는 문화적인 배경까지 고려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여섯달 가량 쌀은행에 대한 의견을 주고 받고, 마을 주민들에게 홍보를 한 후, 마침내 끄나욱 마을과 트메이 마을에서 주민들의 만장일치로 쌀은행의 건립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단 모든 사람들의 이해와 지지를 얻어 내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더군요. 마을 사람들은 십시일반으로 쌀은행 건설에 필요한 나무와 톱, 자신들의 인력까지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우리들은 약속대로 전기톱과 전문가를 지원했어요. 때마침 추수기가 되어 마을 사람들은 가난한 살림에도 문제없이 55kg의 가입비 명목의 쌀을 내놓을 수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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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은행 준공식이 열린 트메이 마을 주민들>

뒤로 보이는 것이 쌀은행 입니다. 사진 우측 하단에 입회비 쌀의 무게를 재기 위한 저울이 보이고, 창고 가득 쌓인 쌀을 보니 벌써 배가 부릅니다.

 

지난 2월, 마지막으로 찾은 크라체 사업장에는 두 개의 쌀은행이 이미 건립되어 준공식과 함께 주민들로부터 거두어 들인 가입쌀을 저장하느라 바쁜 모습이었습니다. 별로 한일이 없는 제게 공을 돌리는 마을 주민들에게, 쌀은행은 여러분의 것이니 주인의식을 갖고 앞으로 오랫동안 사용하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친구 사이에는 따로 고맙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덧붙여 이제 캄보디아에서의 1년 근무를 마치고 네팔로 파견 근무를 나가니 앞으로 늘 건강하고 어린이들을 꼭 학교에 계속 보내달라는 제 마지막 부탁에,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빨리 한국에 가서 시집을 가야지 또 다른 나라에 가면 어쩌냐고 우리 부모님이나 하실 말씀을 하시기에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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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힘들게 일해준 청년 활동가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 : 한번도 본 적 없는 삼색펜에 각자의 이름까지 붙여서 선물하는 센스!>

뒤돌아 보면 지난 1년간 캄보디아 크라체 사업장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아동들의 출석률이 올라갔고, 마을 사람들은 어린이들도 보호받을 권리, 참여할 권리, 자신을 개발할 권리 등이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답니다. 우물과 화장실이 지어져 어린이들이 학교에서 조금 더 편안한 생활을 하게 되었고,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은 절대적 빈곤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는 날개짓을 시작하고 있지요. 직접적인 도움을 받은 600명의 어린이 외에도, 그 아동들의 가족들, 그 아동들의 친지 등이 우리 사업의 직간접적인 수혜자이자 활동가로 자신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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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발전위원회 분들이 준비해주신 송별회 : 같이 일하던 청년활동가들이 마을에서 꺾어온 들꽃까지 선물로 주었을 때는 눈물이 왈칵>

물론 제게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지요. 캄보디아 음식에 너무 적응을 잘한 덕에 살도 찌고, 작렬하는 태양아래 있다 보니 주근깨가 얼굴 전체를 덮고 피부색은 현지인과 똑같아져 버렸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1년간의 경험을 통해 제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과 신념을 얻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근무 초기에는 너무 절망적으로 보였던 마을과 어린이들의 상황, 그들을 위해,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자포자기의 심정이 없지 않았어요.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어찌 보면 미약해 보이는 600명이라는 숫자지만, 그들 내부에서 나오는 변화의 열망 속에 제가 함께 했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뿌듯하기 그지 없답니다. 그리고 마을을 찾을 때마다 어린이들이 내게 보여주었던 그 순수한 미소와 관심은 서울과 런던에서 살아오면서 인간미를 잃어가고 있던 내게 다시금 삶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앞으로 김윤정양의 글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인가! 여러분들의 탄식이 들리는군요. ^^;

하지만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3월 한 달간 잠시 한국에서 쉬다가 4월부터 네팔로 파견됩니다. “쟤가 철이 없어서 그래. 저러다가 한국에 들어와서 다시 적응하고 시집가고 잘 살 거야” 하던 친지들의 말씀을 또다시 어기고, “철 없이” 이번에는 2년 동안 네팔로 갑니다.

앞으로도 계속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 홈페이지를 통해 사람 냄새가 폴폴 나는 이야기를 전할 계획이니 제 글을 통해 더욱 많은 분들이 우리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느끼시게 되길 기원하며, 다음엔 네팔에서 소식 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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