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부모 잃고 홀로 시리아 탈출 소년
2017.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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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어머니의 꿈, 제가 이룰 거예요"

- 시리아 난민 소년의 '두 번째 봄'


2016년 10월 18일, 안녕! 살마
시리아 소년 살마(가명)은 친구들 앞에 섰습니다. 긴장한 표정입니다. 그가 다니는 서울의 한 중학교입니다. “제가 한국에 오게 된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학교 친구들이 살마를 이해할 수 있도록 난민지원단체 ‘피난처'가 마련한 자리입니다. “1학년 2반 살마입니다” 외에는 아랍어로 말했습니다. 


▲  친구들이 응원 메시지를 들고 있습니다.  


 “제 고향 다마스쿠스는 살아 있는 박물관처럼 유적지가 많았어요. 정말 아름다운 이슬람 사원들이 있었어요. 전쟁으로 폐허가 됐어요. 시체들이 거리에 널렸고 총소리만 들렸어요. 어머니는 장 보고 오시는 길에 총 맞았어요. 아버지는 운전 중에 폭탄을 맞았어요. 그 뒤 2년은 제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슬픈 시간이었어요. 어느 날 한국에 있던 형한테 절 데려올 수 있겠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두려웠지만 형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고 설레기도 했어요. 자바다리 국경을 지나 레바논 공항으로 가는데 폭탄이 쏟아졌어요. 택시를 타고 전 속력으로 달렸어요. 한국에 도착하고 16일 동안 난민 신청자로 공항에 갇혀 있었어요. 그래도 총소리가 안 들려 안전하다고 느꼈어요.”
 숨 죽였던 친구들이 질문을 쏟아냅니다. “우리 중학교는 어때?” “아주 좋아.” “페이스북을 보니까 옆에 여자가 있던데 여자 친구야?” 살마 얼굴이 금세 붉어졌습니다. “그냥 친구 그냥 친구” 친구들은 희망의 말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어.” 살마 얼굴이 더 달아오릅니다. “고마워.”



▲ 살마에게 궁금한 점과 하고 싶은 말을 적는 학교 친구들. 


 짧은 자기소개에 혼자 견뎌야 했던 고통의 시간을 다 담을 수 없었습니다. 화학을 좋아하던 살마는 2012년부터 학교에 다니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납치당했어요. 군대로 끌려간다고 했어요.” 택시 운전기사였던 아버지, 주부였던 어머니 모두 2014년 숨졌습니다. 건물 잔해 아무 곳에나 숨어 노숙 했습니다. “자살을 생각했어요. 아무런 희망이 없었어요.”
 한국에서 자동차 정비 일을 하던 형은 월급 150만원을 악착 같이 모아 살마의 탈출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2016년 1월 살마는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게 ‘정상’이었어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줄 알았는데, 친절했어요.” 닫힌 줄 알았던 미래가 다시 열렸습니다.


 2016년 12월 29일, 살마의 두 번째 생일
이날 케이크를 샀습니다. 겨울 방학 전까지 라미가 머물렀던 난민지원단체 ‘피난처’로 향했습니다. 살마의 진짜 생일이자 난민인정을 받은 날입니다. 한국의 난민 인정률은 3%대입니다. 시리아 출신 난민 신청자 1052명 가운데 난민 지위를 인정 받은 사람은 단 4명, 그 중 한 명이 살마입니다. 난민 지위를 인정 받지 못하면 건강보험 등 사회보장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습니다. “난민 인정 받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정말 고마웠어요. 한국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2년 안에 한국 국적을 딸 거예요. 책 6권을 외워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한국 사회나 역사를 알고 싶어요.” 


올해 2월, 부쩍 자란 살마가 난민지원단체 '피난처' 선생님들과 웃고 있습니다.


 2017년 2월 라미의 봄 
부쩍 자랐습니다. 이제 청년 같습니다. “드라마로 한국어 배워요. <별에서 온 그대> 좋아요. 사랑 이야기.” 한국어로 문장도 만듭니다. “친구들 많이 생겼어요. 베프도 있어요. 학교 끝나면 편의점에서 라면도 같이 사먹고 쉬는 시간에 10분 동안 산책도 해요. 왜 좋냐고요? 그냥 그 친구가 좋아요.”
 고향을 생각하면, 가슴이 시립니다. “결혼한 누나 한명 시리아에 남아 있어요. 모두 죽었어요. 내 친구 마르완, 제가 부모님 돌아가시고 자살을 생각할 때 그 친구 덕분에 살아  남았어요. 재워 주고 밥도 해주고. 한국으로 오기 전에 꼭 한번 만나고 싶었는데... 제가 죽도록 일해서라도 한국으로 데려오고 싶었는데, 연락이 끊겨버렸어요. 내 형제 같은 친구.”
 한 때 고향은 찬란했습니다. “대공원에 호두가 많았어요. 친구들이랑 호두를 모아 씻어 팔았어요. 저축도 하고 남편이 일거리가 없는 누나도 도와주고요.” 살마의 추억, 고통, 바람이 그가 쓰는 랩이 됩니다. “아이들이 어떻게 눈 속에서 죽어갔는지,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 이야기...”
 한국에도 아직 완연한 봄은 오지 않았습니다. 대화를 나누려면 아랍어 통역이 필요합니다.또 하나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학교 근처 난민지원센터 ‘피난처’에서 살던 살마는 인천 형 집으로 옮겨 4시간씩 통학하게 됐습니다. 신혼인 형의 원룸에 셋이 살다보니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많이 밖에 나가줘요. 형이 불편할 까봐. 학교를 옮기면 또 적응해야 해서 전학 가고 싶지 않아요.”
 살마는 봄을 기다리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어로 랩을 쓰고 싶어요. 너무 너무 한국어 학원 다니고 싶어요.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해서 돈을 모아 갈 거예요. 연극을 배워 배우가 될 거예요. 배우는 어머니의 꿈이었어요.” 그리고 언젠가 고향 대공원에 열린 호두를 다시 볼 수 있기를. 


법무부 자료를 보면, 난민신청자는 2013년 1,574명, 2014년 2,896명 2015년 5,711명으로 매년 급증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3%만 난민 지위를 인정 받았습니다.(2015년) 난민 신청자는 건강보험 등 사회보장 혜택을 받을 수 없고 신청자 가운데 10% 정도만 최장 6개월, 그것도 최저생계비의 70% 정도만 경제적 지원을 받습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2011년부터 난민 신청 아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첫해 20명을 시작으로 매년 늘어 올해엔 146명을 돌봅니다. 1세 미만 영아는 양육비 월 20만원, 미취학아동은 보육기관 이용료 월 30만원, 초,중,고등학생은 방과 후 활동 월 15만원을 지원합니다. 필요에 비하면 미미 합니다. 그래도 모든 아동은 보호와 교육 받을 권리가 있기에 세이브더칠드런은 힘 닿는 한 난민 신청 아동을 돕겠습니다.


 김소민(커뮤니케이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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