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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서 ‘아동’을 바라본 당찬 여성, 에글렌타인 젭
사람들
201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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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이브더칠드런 창립자, 에글렌타인 젭 


1919년 '세이브더칠드런'을 창립한 에글렌타인 젭(1876.8~1928.12).  

세계 최초로 '아동'에 초점을 맞춘 NGO를 창립한 그녀는 종교, 인종, 국적, 정치적 이념을 초월한 거침없는 활동으로 전 세계에 '아동 권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요, 


시대를 앞서나간 당찬 여성, 에글렌타인 젭의 불굴의 의지와 아이들을 향한 그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소개합니다! 



1. 위험한 전단지, 영국이 꿈틀대기 시작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는 '적국' 이었다는 이유로 연합국이 펼친 봉쇄정책 속에서 극심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특히 기아 문제는 심각했는데요, 에글렌타인 젭은 기아의 참상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하고 구호기금을 모을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실제 아이의 사진이 담긴 전단지를 직접 제작했습니다. 



굶주린 오스트리아 어린이의 사진이 담긴 전단지.  에글렌타인 젭은 이 전단지를 직접 제작해 런던의 트라팔가 광장에서 뿌리다 체포되었다. 전단지 오른쪽 상단에 그녀가 직접 연필로 쓴 억압받고 있다! 이란 글자가 눈에 띈다. 


사진 속 아이는 2살 반인데, 체중이 그 연령대 일반적인 아이 몸무게의 40%에 불과합니다. 에글렌타인 젭은 극심한 굶주림으로 제대로 된 발육을 하지 못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어린이의 모습을 담은 이 전단지를 1919년 5월 트라팔가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봉쇄정책 완화' 마저도 '적국을 돕는 배신자'로 여겨지던 시절, '적국의 아이들을 돕자'는 그녀의 외침은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2. 벌금 5파운드, 최초의 후원금이 되다

이렇게 당시로선 위험한 전단지를 배포한 혐의로 에글렌타인 젭은 결국 체포되고 맙니다. 이는 당시 영국의 '전시 국토방위법'에 따라 실형을 살거나 배포한 전단지 한 장당 5파운드라는 무거운 벌금을 물어야 할 범죄였습니다.



▲ 1919년 5월 16일자 <데일리헤럴드> 신문 1면. 법정 소송에 휘말린 에글렌타인과 바버라 에어턴 굴드가 시장 관저 밖에 있는 모습과 그들이 배포하다가 체포된 전단지가 함께 실려있다.


하지만 그녀의 재판은 도리어 비인간적인 연합국의 봉쇄정책의 문제점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고통 받는 아이들과 취약한 사람들을 돕자는 그녀의 주장은 재판부의 마음마저 움직였습니다.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벌금은 5파운드에 불과한, 사실상 승소한 것이나 다름없는 판결이었는데요,  


뿐만 아니라 에글렌타인 젭의 열정에 감동한 검사가 상징적으로 5파운드를 기부하면서 '벌금 5파운드'는 세이브더칠드런의 초창기 후원금이 되었습니다. 



3. 전쟁 영웅담을 좋아하던 소녀, 전쟁의 참상에 눈 뜨다

어린 시절 에글렌타인 젭은 이야기나 시 쓰는 것을 좋아해서 가족들은 모두 에글렌타인이 크면 위대한 시인이나 문학가가 될 거라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그 중에서 특히 용맹한 기사의 무용담 이야기 쓰는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9살 때는 크림전쟁을 소재로 한 앨프리드 테니슨의 시 '경기병 여단의 공격(The Charge of the Light Brigade)'을 읽고 군인의 세계를 동경해서 식구들마다 군대식 계급을 붙여준 것은 물론 마당에 깃발을 꽂고 가상의 지도를 만들어 점령 작전을 짜면서 놀 정도였다고 하네요.



▲ 1889년, 에글렌타인 젭이 13살 때 찍은 사진(뒷줄 왼쪽 끝부터 시계방향으로 에글렌타인 젭, 남동생 가물, 큰고모 노니, 큰고모부 제임스, 작은 고모 번, 언니 릴, 여동생 도로시) 


그렇게 전쟁과 전쟁영웅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던 어린 에글렌타인은 1914년, 그녀의 나이 38세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을 목격하고 전쟁의 참상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됩니다. 특히 어른들이 벌이는 전쟁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모든 전쟁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치러진다는 생각을 굳혔습니다. 


1919년 영국에서 세이브더칠드런을 설립한 에글렌타인 젭은 이렇게 전쟁으로 인한 아이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서는 국가의 이익을 초월해 각국이 협력하는 '국제 협력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는 1920년 1월 제네바에서 '국제 세이브더칠드런 펀드 연합'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는데요, 이 1920년 1월에 현재 ‘국제연합’(UN)의 전신인 '국제연맹'도 설립되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그녀의 행보는 세계 지도자들과 맥을 함께 할 정도로 매우 선진적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이브더칠드런이 국제 기구가 되면서 곧 아일랜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공 등에 세이브더칠드런 사무소가 꾸려지게 되었는데 에글렌타인 젭은 이를 위해 런던, 제네바, 마케도니아, 이탈리아, 프랑스 등을 1주일 내에 돌아다니는 무시무시한 강행군을 소화할 만큼 열정적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4. 자린고비 에글렌타인 젭 

세이브더칠드런을 설립한 에글렌타인 젭은 '자린고비'로 유명했습니다. 동전 한 푼 허투루 쓰는 법이 없었던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작은 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재활용 했을 정도로 짠순이였다고 합니다. 



▲ 영국 소호 황금광장의 세이브더칠드런 첫 사무실. 당시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은 군막사의 가구를  재활용하고 버려진 신발 박스를 사용해 업무를 했다. 에글렌타인은 아동을 위해 쓰여야 할 기금을 일절 낭비하지 않기 위해 사무실 바닥에 버려진 핀 마저 재활용했다.


상당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원한다면 마음껏 누리고 살 수 있었을 테지만 에글렌타인 젭은 평소 자신을 꾸미거나 치장하는 데에도 전혀 관심이 없어 가족들이 '정말 너는 좀 꾸며라. 너무 수수하고 남자같다.' 고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에글렌타인 젭이 직접 그린 그녀의 자화상



에글렌타인 젭이 이렇게 자신의 안락함을 기꺼이 포기하고 짠순이로 살아갔던 이유는 바로 그녀의 이 한 마디에 모두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파괴하는 데에 돈을 퍼붓는다 … 언제쯤이면 우리는 지금 고통과 절망의 희생양이 된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막대한 돈을 쓰게 될까?"


아낄 수 있는 최대한을 아껴,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을 모아 한 명의 아이라도 더 구하길 바랬던 에글렌타인 젭. 고통받는 아이들을 향한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간절했던 그녀의 마음이 바로 오늘날의 '세이브더칠드런'을 만든 밑거름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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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은정(커뮤니케이션부)


100년의 믿음,
세이브더칠드런과 함께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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